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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정 The Case of Korea

KIATS(키아츠)

Henry Chung (정한경) (지은이), 김재현 (옮긴이), 김승태 (감수)

2019-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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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저자소개
목차
<b>역사가 기억해야 할 인물, 정한경(鄭翰景)<BR><BR>3·1운동</b><BR> 3·1운동이란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본의 억압적인 식민정책에 저항해 한국민족이 일으킨 거국적인 독립운동이다. 1910년 일본의 강압적인 병탄 이래, 나라를 빼앗긴 한국인들은 주체성을 갖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해 자주독립과 자유를 추구했다. 3·1만세운동, 혹은 3·1혁명이라 불리는 이 운동은 3월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급속하게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BR> 일본은 3·1운동을 억누르는 과정에서 수많은 한국인들을 국내외에서 체포하고, 고문을 가하고, 도륙했고, 한국인의 거주지와 교회 등 건물들을 불태웠다. 심지어 일본인 소방수들과 민간인들까지 동원해 한국인들에게 잔학행위를 가했다. 한국인들의 비폭력 만세운동은 일본인들의 잔학성과 극명한 대조를 보였다.<BR> 당시 한반도는 일제에 의해 철저하게 봉쇄되어 있었고, 한국인들이 맞닥트린 비극적인 상황과 만세운동이 외부세계로 전파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프랭크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와 앨버트 테일러(Albert W. Taylor) 같은 외국인들을 통해 3·1운동은 재빨리 전 세계에 알려졌다. 비록 1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평화회의를 통해 한국은 재편된 국제 질서에서 독립이라는 혜택을 당장 얻지는 못했지만, 한국인들의 3·1만세운동은 국제사회에 깊게 각인되었다.<BR><BR><b>잊혀진 인물, 정한경(Henry Chung De Yong, 1890-1985)</b><BR> 전 세계 약소민족들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한국의 3·1운동은 어떻게 기록되고, 외부세계로 알려지고, 그 핵심 내용이 정리되었을까? 물론 이 과정에 국내에 거주하고 있던 외국인 선교사, 기자, 거주민들의 기여는 절대적이었다.<BR> 그렇다면 정작 만세를 불렀고, 온갖 잔학행위를 직접 당한 한국인 자신들은 어떤 기여를 했을까? 한국인들도 자신들이 처한 상황과 만세운동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몸부림쳤고, 선교사들에게 자신들이 당한 처참한 상황을 이야기하고, 편지로 알렸다. 비록 외국인들의 글과 증언에 비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한국의 상황을 전 세계에 알리려는 한국인들 스스로의 노력만큼은 결코 덜하지 않았다.<BR> 이런 상황에서 1921년 미국 대학에서 이승만 이후 두 번째로 박사학위를 받은 헨리 정(Henry Chung De Yong, 정한경)이 3·1만세운동의 전모를 정리하고 분석해서 박사 논문으로 제출했다. 한국의 역사와 지리 소개에서 시작해, 3·1만세운동의 원인과 진행 상황과 결과를 기존 자료들을 분석해 18개의 장으로 정리해 냈다. 여기에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 일본법원의 판결문과 일본 연감의 각종 자료들을 부록으로 담았다. 한국인이 3·1운동에 대하여 그것도 영어로 이렇게 논리적이고 포괄적인 기록물을 남긴 것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다.<BR><BR> 정한경은 1890년 2월 28일에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20세기 한국 역사를 삶으로 겪다 1985년에 죽었다. 95세의 긴 인생을 살다 갔지만, 안타깝게 그의 어린 시절과 해방 이후의 행적에 대하여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10대와 20대의 정한경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박용만과 박용만의 삼촌 박장현이었다. 정한경이 평남 순천에서 상동청년회 부속학교로 시작된 사립 시무학교에서 교육을 시작한 것도 그들의 도움을 통해서다. <BR> 정한경은 1904년 14세의 나이에 ‘새로운 학문을 배워 조국을 문명 개발하기 위해’ 한국을 떠났다. 당시 한국을 강타한 서양문명의 충격에 도전을 받은 정한경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와 가족을 설득해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1905년 15세에 LA에 안착했다. 미국에 입국하면서 그의 이름에 De Yong(대영)이 더해졌고, LA에서 한인(복음)전도관의 셔먼 부인은 그에게 헨리(Henry)라는 영어 이름을 더해주었다. 셔먼 부인은 그가 저렴한 집세를 내고 영어로 기독교를 접할 수 있게 해주었고, 남의 집에 가서 허드렛일을 해주고 돈을 버는 ‘스쿨 보이’도 소개해 주었다. <BR> 하지만 아직 영어와 미국문화에 익숙하지 못했던 그는 어려움을 겪다 박장현과 박용만을 따라 1906년 4월에 네브래스카(Nebraska)로 갔다. 그해 9월에 커니(Kearney) 시의 초등학교 4학년에 입학한 그는 미국 사회에 적응하면서 영어 습득과 연설 부분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갔다. 이후 정한경은 네브래스카주립대학에서 정치학으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았다. 나아가 워싱턴 D.C.에 소재한 아메리칸대학에서 정치외교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우리가 이번에 번역한 이 책은 바로 이 대학에 제출한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었다. 정한경의 탁월한 언어능력과 설득력이 한국인이었지만 영어로 일제의 침략적 만행과 한국의 독립 의지를 미국을 비롯한 서구세계에 호소하게 했다. 이후 그는 일리노이주의 노스웨스턴대학에서 조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BR> 정한경은 박용만과 이승만에 비해서는 2세대 독립운동가로 분류될 수 있지만, 중요성에 있어서는 그들과 함께 주요 독립운동가 반열에 자리하고 있다. 그는 네브래스카에서 박용만 등이 주축이 되어 시작한 한인소년병학교에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중심적 역할을 했으며, 유일한과 함께 1911년에 3년제 한인소년병학교 과정을 마쳤다. 1919년 그는 대한인국민회를 통해 파리평화회담에 참석할 대표 3명 중의 한 명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상해임시정부의 구미위원부 위원으로 활약하였고, 1919년 2월 25일부터 1921년까지 임시정부의 주된 화두였던 위임통치청원서 논쟁의 한 중심에 이승만과 같이 서 있었다.<BR> 그러나 네브래스카 시절 이후 3·1운동 전후 활약상을 제외하고는 그의 활동은 지금까지 베일 뒤에 감추어져 있다. 그에 대한 기록은 소니아 신(Sonia Shinn)이 편집한 구술기록자료에도 남겨져 있지만, 이는 우리의 이번 연구의 범위를 벗어나는 작업이다(Sunwoo, Sonia Shinn 편집, Korea Kaleidoscope: Oral His tories 1, Early Korean Pioneers in USA 1903-1905(Davis, CA: Korean Oral History Project, 1982). 우리나라는 1945년에 해방을 맞이했다. 한국 정부는 1962년 자신의 젊음을 바친 정한경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그는 1985년 6월 30일 다사다난했던 인생을 마무리했다. <BR><BR><b>The Case of Korea</b><BR> 이 책은 1921년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이 모태가 되어, 출간되었다. 이 책은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정한경의 학적인 재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정한경의 이 책은 두 가지 의미에서 중요하다. 첫째는, 미국에서 정치외교학 분야로 박사과정을 통한 학문적 훈련을 받은 후에 당대 한국의 상황과 일본의 수탈에 관해 상당히 수준 있는 학문적 분석을 해냈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억압받는 한국인 당사자로서 당대 한국의 상황과 일본의 잔학행위를 구체적으로 해외에 널리 알린 희귀문서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한국인으로서 3·1운동 현장의 생생한 자료를 해외에, 그것도 영어로 알린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 책의 서문을 썼던 미국의 상원의원인 셀든 스펜서(Shelden Spencer)도 이점에 동의했다. <BR> “이 책의 내용은 다분히 설명적이며 큰 감동을 준다. 모든 미국인들이 신중하게 고려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 책은 주의를 끌만한 가치가 있으며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BR> 정한경은 이미 1919년 3월 20일 자 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에 “Korea’s Appeal”이란 기고문을 통해 일본의 만행과 한국이 독자적인 정부 운영의 능력이 있음을 강조했다. 1919년 5월에는 〈아시아〉(ASIA)에 “Korea Today-A Korean View of Japan’s Colonial Policies”(Vol. 19:5, May. 1919)를 기고하였다. 또한 일본의 국제적인 선전술을 다룬 The Oriental Policy of the United States(New York, Chicago: Fleming H. Revell Co., 1919)을 출간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1921년에 출간된 The Case of Korea는 적지 않은 미국인들의 관심을 끌었고, 최소한 2명 이상의 전문가들이 그의 책에 대한 서평을 썼다(스탠포드 대학의 Payson J. Treat, The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Vol. <BR>15.4(Nov. 1921), pp.612-613.; Charles C. Tansill, Political Science Quarterly, Vol. 37(2)(Sep. 1922), p.542.).<BR> 정한경은 이번에 필자가 번역한 The Case of Korea 외에도 몇 권의 책을 더 남겼다. <BR> Korean Treaties(H. S, NICHOLS. INC., 1919)<BR> The Russians Came to Korea(Korean Pacific Press, 1947)<BR> Korea and the United States through War and Peace, 1943-1960(Seoul: Yonsei University Press, Institute for Modern Korean Studies Historical Materials Series; no.4, 2000)<BR><BR><b>감사와 기대</b><BR> 이 작업은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서 독립운동 관련 1차 사료를 발굴해 널리 알리기 위해 국가보훈처가 지원해 진행했다. 이런 귀중한 기회를 제공해 준 국가보훈처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국가보훈처의 지정사업으로 신청하도록 행정적인 절차를 도와주신 (사)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와 이항 회장님과 정운찬 전 회장님께도 감사를 표한다. 또한 이 작품을 제안해 주고, 꼼꼼히 감수해 주신 김승태 박사께도 깊은 감사를 표한다. 또한 번역작업을 하는 데 도움을 주신 여러분들, 편집작업을 수고해 주신 키아츠의 직원들께도 고마움을 표시한다. <BR> 이 책을 통해 오랫동안 잊혀졌지만,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정한경의 삶과 그의 애국적 노력이 새롭게 한국민들을 만나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100년 전에 고향을 떠난 타국에서 외로운 학문적이고 실천적인 독립투쟁을 했던 그의 외침이 이제는 많은 분들의 양심과 삶에서 공명을 이루어내기를 기대한다. <BR><BR> 2019년 12월 <BR> 김재현, 키아츠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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